남송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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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종은 남송의 초대 황제이다.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흠종의 이복 동생으로, 금나라의 침략으로 북송이 멸망하자 강남으로 피신하여 남송을 건국했다. 그는 즉위 후 군사력 강화와 문화 발전에 힘썼으나, 금나라와의 화평을 추구하며 주전파와 갈등을 겪었다. 말년에는 양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났으며, 서예에도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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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 고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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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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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조구(趙構) |
자 | 덕기(德基) |
묘호 | 고종(高宗) |
시호 | 수명중흥전공지덕성신무문소인헌효황제(受命中興全功至德聖神武文昭仁憲孝皇帝) |
생년 | 1107년 6월 12일 |
몰년 | 1187년 11월 9일 |
출생지 | 변량, 북송(현재의 허난성 카이펑시, 중국) |
사망지 | 린안, 남송(현재의 저장성 항저우시, 중국) |
묻힌 곳 | 영사릉(永思陵, 현재의 사오싱시, 저장) |
서명 | [[File:宋高宗御押.svg|50px]] |
통치 정보 | |
왕조 | 송나라 (남송) |
재위 시작 | 1127년 6월 12일 |
재위 종료 | 1162년 7월 24일 |
퇴위 시작 | 1162년 7월 24일 |
퇴위 종료 | 1187년 11월 9일 |
즉위식 | 1127년 6월 12일 |
이전 통치자 | 흠종 |
이후 통치자 | 효종 |
연호 | 건염(建炎; 1127–1130) 소흥(紹興; 1131–1162)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휘종 |
어머니 | 현인황후 |
배우자 | 헌절황후 (1139년 사망) 헌성자열황후 (1187년 사망) |
자녀 | 조부 (양자) 강국공주 제2강희공주 제3강혜공주 제4강숙공주 제5강헌공주 |
2. 생애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인 고종은 금이 북송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자 강남으로 도주하여 항저우(임안)에서 남송을 건국하였다.[1] 남송 건국 후,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군사 방면을 중시하여 발전시켰으며,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고종의 초기 통치는 여진족의 공격과 침략으로 가득했다. 이강, 종택, 악비, 한세충, 유윤문과 같은 군사 지도자들을 기용하여 여진족을 막고, 송 제국을 예전의 영광으로 되돌리겠다는 선언을 통해 그의 대중적 이미지를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흠종이 복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억지스러운 혐의를 씌워 이강을 해임했다.[2]
잉톈푸의 취약성으로 인해 고종은 1127년 말 또는 1128년 초에 양저우로 이동했다. 그러나 양저우 역시 안전한 피난처가 되지 못했고, 1129년 임안으로 부분적으로 피난했다. 며칠 후 고종은 여진족 선봉 부대보다 불과 몇 시간 앞서 말을 타고 간신히 탈출했다.[3]
1129년 3월, 고종은 묘부(苗傅)와 류정언(劉正彥)이 이끄는 궁궐 경비병들의 반란으로 왕위를 잃었다. 그들은 고종에게 그의 두 살배기 아들 조부(趙昺)에게 양위하도록 강요했다. 이 음모는 1129년 4월, 묘와 류가 한세충이 이끄는 고종의 충성스러운 군대에 패배하고 반역죄로 처형되면서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종말을 맞았다. 왕위를 되찾은 후 고종은 금나라 군대에 쫓겼고 1130년대 후반까지 남중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이 반란으로 고종은 수도를 건강으로 옮겼다.
1130년, 여진족 장군 오주가 건강 남서쪽 양쯔강을 건너 도시를 점령하고 고종을 잡기 위해 빠르게 진격했다. 금나라는 1월 22일 항저우를 점령했고, 2월 4일에는 더 남쪽의 사오싱을 점령했는데, 고종은 린안 근처 밍저우에서 오주에게 거의 잡힐 뻔했지만, 장준이 잠시 금나라의 진격을 멈추게 하여 고종이 배를 타고 도시를 탈출할 기회를 주었다. 곧 여진족은 추격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그들은 항저우와 쑤저우의 방어되지 않은 도시를 약탈한 후 악비와 한세충이 이끄는 송나라 군대의 저항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1130년, 황천탕 전투 동안 남쪽으로 도망치면서, 그는 당시 27세에 불과했던 새로 임명된 총사령관 악비에게 방어를 돕도록 했고, 악비는 난징 근처에서 금나라 군대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송나라 군대가 금나라를 물리친 후, 그들은 양쯔강 북쪽에 머물렀고, 고종은 1133년 카이펑을 대신하여 린안을 왕조의 새로운 임시 수도로 선포했다.[4]
1132년에 수도를 임안으로 정하고 남송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고종은 금나라 군대의 남하를 두려워하여 화평파에 기울어져 있었다. 1138년 화평파를 대표하는 진회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같은 해 금나라와 화약을 체결하였다. 이 때문에 주전파인 악비와 진회의 대립이 생겼고, 1141년 악비는 진회에 의해 처형되었다. 통치 후반에는 금나라와 다시 화목 조약을 체결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는 한편, 강남의 개발이 진행되었다.
1162년 진회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이 침공했으나, 해릉왕은 권력 확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에 금나라 황족 중 한 명인 완안옹이 반란을 일으켰다. 금나라 유력자들이 완안옹에게 모여들었고, 해릉왕은 군중에서 살해되었다. 완안옹은 금나라 세종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 해 고종은 퇴위하여 태상황이 되고, 양자인 효종이 즉위하였다. 고종은 1187년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과정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흠종의 이복 동생으로, 어머니는 현인황후 위씨였다. 처음에는 광평왕(廣平王)에 봉해졌다가 강왕(康王)으로 책봉되었다.[13] 1126년, 대원수(大元帥)에 임명되었다.1127년 정강의 변으로 휘종, 흠종을 비롯한 북송 황족들이 금에 포로로 끌려갈 당시, 고종은 외교 임무로 자저우(磁州)에 있었기 때문에 남경(응천부, 현재의 허난성상추시)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원우황후의 지명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여 남송을 건국하였다.
하지만 고종의 즉위는 정통성 논란에 휩싸였다. 궁정의 일부에서는 즉위 절차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이 때문에 고종은 형 흠종이 금나라에서 송환될 경우 자신의 황위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여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반면, 정처 형씨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으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금나라는 고종에게 굴욕을 주기 위해, 어머니 위현비·처 형씨[14] 및 딸 조불우·조신우 4명[15]을 세탁원이라 불리는 금나라 황족·관료용 기루에 보냈고, 형씨는 만주의 오국성에서 병사했다.[16]
2. 2. 남송 건국과 통치
휘종의 9남이자 흠종의 아우로, 금이 북송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자 강남으로 도주하여 항저우(임안)에서 남송을 건국하였다.[1]고종의 초기 치세는 여진족의 공격과 침략으로 가득했다. 이강, 종택, 악비, 한세충, 유윤문과 같은 군 지도자들을 기용하여 여진족을 막고, 송 제국을 예전의 영광으로 되돌리겠다는 선언을 통해 그의 대중적 이미지를 개선하려 했으나, 흠종이 복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억지스러운 혐의를 씌워 이강을 해임했다.[2]
잉톈푸의 취약성으로 인해 고종은 1127년 말 또는 1128년 초에 양저우로 이동했다. 그러나 양저우 역시 안전한 피난처가 되지 못했고, 1129년 임안으로 부분적으로 피난했다. 며칠 후 고종은 여진족 선봉 부대보다 불과 몇 시간 앞서 말을 타고 간신히 탈출했다.[3]
1129년 3월, 고종은 묘부(苗傅)와 류정언(劉正彥)이 이끄는 궁궐 경비병들의 반란으로 왕위를 잃었다. 그들은 고종에게 그의 두 살배기 아들 조부(趙昺)에게 양위하도록 강요했다. 이 음모는 1129년 4월, 묘와 류가 한세충이 이끄는 고종의 충성스러운 군대에 패배하고 반역죄로 처형되면서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종말을 맞았다. 왕위를 되찾은 후 고종은 금나라 군대에 쫓겼고 1130년대 후반까지 남중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이 반란으로 고종은 수도를 건강으로 옮겼다.
1130년, 여진족 장군 오주가 건강 남서쪽 양쯔강을 건너 도시를 점령하고 고종을 잡기 위해 빠르게 진격했다. 금나라는 1월 22일 항저우를 점령했고, 2월 4일에는 더 남쪽의 사오싱을 점령했는데, 고종은 린안 근처 밍저우에서 오주에게 거의 잡힐 뻔했지만, 장준이 잠시 금나라의 진격을 멈추게 하여 고종이 배를 타고 도시를 탈출할 기회를 주었다. 곧 여진족은 추격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그들은 항저우와 쑤저우의 방어되지 않은 도시를 약탈한 후 악비와 한세충이 이끄는 송나라 군대의 저항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1130년, 황천탕 전투 동안 남쪽으로 도망치면서, 그는 당시 27세에 불과했던 새로 임명된 총사령관 악비에게 방어를 돕도록 했고, 악비는 난징 근처에서 금나라 군대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송나라 군대가 금나라를 물리친 후, 그들은 양쯔강 북쪽에 머물렀고, 고종은 1133년 카이펑을 대신하여 린안을 왕조의 새로운 임시 수도로 선포했다.[4]
1126년 정강의 변이 발생했을 때, 남경(응천부, 현재의 허난성상추시)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철종의 황후였던 원우황후의 지명을 받아 황제에 즉위했다. 이것이 남송의 기원이다. 그러나 이 즉위 절차에 대해서는 궁정의 일부에서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여, 즉위한 황제 자리는 궁정에서 확립된 것이 아니었다.
즉위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고종의 지위는 안정되지 못했고, 국내에서는 즉위 반대파에 의한 반란, 국외에서는 금나라의 남하 등, 내우외환의 시대였다. 1132년에 드디어 수도를 임안으로 정하고, 남송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고종은 금나라 군대의 남하를 두려워하여 화평파에 기울어져 있었다. 1138년, 화평파를 대표하는 진회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같은 해에 금나라와 화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주전파인 악비와 진회의 대립이 생겼고, 1141년에는 악비가 진회에 의해 처형되었다. 통치 후반에는 금나라와 다시 화목 조약을 체결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는 한편, 강남의 개발이 진행되었다.
2. 3. 퇴위와 죽음
1162년 진회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이 침공했지만, 해릉왕은 권력 확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에 금나라 황족 중 한 명인 완안옹이 반란을 일으켰다. 금나라 유력자들이 완안옹에게 모여들었고, 해릉왕은 군중에서 살해되었다. 완안옹은 금나라 세종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 해 고종은 퇴위하여 태상황이 되고, 양자인 효종이 즉위하였다. 고종은 1187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정치 및 외교 정책
금 희종은 태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고 평화를 추진했다. 금 희종과 그의 장군들은 유예의 군사적 실패에 실망했고, 유예가 악비와 은밀히 공모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1137년 말 금나라는 대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했고, 금나라와 남송은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1138년, 고종은 임안을 공식적인 수도로 선언했지만, 임시 수도라는 표시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임안은 이후 150년 동안 남송의 수도이자 주요 상업 및 문화 중심지로 성장했다.
고종은 같은 해 진회를 승진시켜 금나라와의 협상을 담당하게 했다. 악비, 한세충 등 많은 조정 관료들이 평화 제안을 비판했지만, 진회는 감찰원을 장악하여 자신의 적들을 숙청하고 협상을 계속했다.
고종은 정강의 변으로 휘종, 흠종 등이 금나라로 끌려갔을 때, 응천부(현재의 허난성 상추시)로 피신하여 원우황후의 지명을 받아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정당성 논란을 낳았고, 고종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흠종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고종은 즉위 초부터 국내 반란과 금나라의 남침 등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1132년 임안을 수도로 정하고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금나라의 위협에 화평을 추구했고, 1138년 진회를 재상으로 임명하여 금나라와 화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주전파인 악비와 진회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1141년 악비는 진회에 의해 처형되었다.
3. 1. 군사 및 내정
고종은 초기에는 이강, 종택, 악비, 한세충, 유윤문 등의 군사 지도자들을 기용하여 여진족을 막고 송나라를 재건하려 했다.[2] 그러나 이강이 홍건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대에 대승을 거두자, 고종은 흠종의 복위 가능성을 우려하여 이강을 해임했다.[2]1127년부터 1129년까지 송나라는 금나라에 13번의 사신을 보내 강화와 고종의 어머니, 휘종의 석방을 협상했으나, 금나라 조정은 이를 무시했다.[1] 1129년 3월, 묘부와 류정언의 반란으로 고종은 잠시 폐위되었으나, 한세충 등의 도움으로 복위했다.[3]
1130년 황천탕 전투에서 악비가 금나라 군대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임안이 새로운 임시 수도로 선포되었다.[4] 한편, 금 희종은 평화를 추진했고, 1137년 금나라는 대제를 폐지하고 남송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7]
고종은 1138년에 진회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금나라와의 협상을 맡겼다.[7] 악비 등 주전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회는 감찰원을 장악하여 협상을 추진했다.[7] 수년간의 전투 후, 고종은 평화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데, 이는 흠종의 복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7]
결국 고종은 악비를 "근거 없는"(莫須有) 혐의로 처형하고,[8] 1142년 소흥의 조약을 체결하여 회수 이북의 영토를 포기하고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를 맺었다.[8] 이 조약으로 황제의 어머니 등이 송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송나라는 금나라의 종속국이 되었다.[9]
3. 2. 금나라와의 관계
고종은 초기에는 금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1127년부터 1129년까지 금나라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강화 பேச்சு를 시도했지만, 금나라 조정은 이를 무시했다.[1]1138년, 고종은 진회를 재상으로 임명하여 금나라와의 협상을 맡겼다.[7] 악비, 한세충 등 많은 관료들이 평화 제안을 비판했으나,[7] 진회는 반대 세력들을 제거하고 협상을 추진했다.
1141년, 소흥의 조약을 통해 남송은 금나라와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남송은 금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매년 막대한 양의 은과 비단을 조공으로 바치게 되었다.[9] 이 협상으로 고종의 어머니 위씨가 남송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황태후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약에서 남송은 "사소한 국가"로, 금나라는 "우월한 국가"로 명시되었다.[9]
1161년, 금나라의 통치자 완안량이 남송을 침략하여 당도 전투와 채석 전투를 일으켰으나, 남송이 승리하였다.[9] 이로 인해 남송은 금나라의 종속국 지위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조공은 바쳐야 했다.
4. 문화적 업적
고종은 능서가로, 많은 서적을 남겼다. 특히 『휘종문집서』는 일본 문화청이 소장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4. 1. 서예
고종은 능서가로, 많은 서적을 남겼다. 그 중 『휘종문집서』는 일본 문화청이 소장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소흥 24년(1154년)에 쓰여진 「휘종 문집 서」(徽宗文集序)는 선대 황제 휘종의 문집 백 권에 고종이 직접 소계로 쓴 서문이다. 전반부가 유실되어 현재 32행이 남아있다. 서풍은 온화하고 기품이 높으며, 매우 자연스럽게 유유히 붓을 움직이고 있다. 고종은 황정견, 미불을 배우고, 마지막으로 왕희지와 왕헌지를 배웠다고 전해지는데, 이 서문은 황정견과 미불의 영향을 벗어나 당나라 사람 이상의 격적(激跡)이라고 평가받는 고종의 대표작이다. 지본(紙本)・세로 27.4cm, 전체 길이 137cm이다.[17][18][19][20]
5. 가족 관계
고종은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흠종의 이복 동생으로, 어머니는 휘종의 후궁이었던 위씨(현인황후)였다. 고종은 아버지와 형제의 치세 동안 조구(趙構)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종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휘종 | |
어머니 | 현인황후 위씨 | |
황후 | 헌절황후 싱씨 | |
황후 | 헌성황후 오씨 | |
후궁 | 장귀비 | |
후궁 | 현비 장씨[11] | |
후궁 | 현비 유씨 | |
후궁 | 현비 반씨|賢妃 潘氏중국어 | |
후궁 | 완의 유씨 | |
후궁 | 미인 풍씨 | |
아들 | 조부 | 첫째, 요절 |
딸 | 강대종희 조불우 | 첫째, 요절 |
딸 | 강이종희 조신우 | 둘째 |
딸 | 강삼종희 | 셋째, 요절 |
딸 | 강사종희 | 넷째, 요절 |
딸 | 강오종희 | 다섯째, 요절 |
고종은 정강의 변으로 인해 가족 대부분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특히, 생모가 불분명한 딸들은 금나라에 끌려가 기루인 세탁원으로 보내지는 수모를 당했다.[15]
5. 1. 황후와 후궁
헌절황후 싱씨(1106년 ~ 1139년)는 고종이 강왕(康王)이었던 시절 정실 부인이었다. 금나라에 억류된 채 황후로 추대되었다.[24][25]헌성자렬황후 오씨(1114년 ~ 1197년)는 고종의 계실 황후이다.[26]
고종은 그 외에도 여러 후궁을 두었다.
봉호 | 비고 |
---|---|
귀비 장씨 | |
현비 장씨[11] | |
현비 유씨 | |
현비 潘氏|반씨중국어 | 아들 조부는 3세에 요절. |
완의 유씨 | |
미인 풍씨 | |
군군 전춘라, 군군 강취미 | 모두 강왕 시절 측실로, 금나라에 연행됨. |
기타 | 장귀비, 재인오옥노(오황후의 일족), 풍미인, 한재인, 이재인, 왕재인[21], 숙국부인 왕씨, 강국부인 소씨, 화국부인 왕씨, 가국부인 주씨, 성국부인 오씨, 윤국부인 장종의, 혜국부인 손씨, 직필 장씨, 전자 손씨, 직필 유씨, 상복 주씨[22], 신흥군부인 진씨, 고평군부인 장씨, 화의군부인 황씨, 안정군부인 이씨, 순정군부인 왕씨, 고평군부인 손씨, 진운군부인 채씨, 남평군부인 장씨, 제안군부인 장씨, 신안군부인 조씨, 함녕군부인 린씨, 평락군부인 왕씨, 함녕군부인 곽씨, 부평군부인 손씨, 사기 유씨, 전적 풍씨, 홍하피 오씨, 홍하피 마이낭(등 9인), 자하피 유안희(등 20인), 청선 유보노(등 20인)[23] |
고종은 생모 불명의 자녀로 딸 다섯을 두었으나, 모두 정강의 변 당시 금나라로 끌려갔다. 이 중 조불우(강대종희)와 조신우(강이종희)는 세탁원에 들어가는 수모를 겪었다.[15]
5. 2. 자녀
元懿중국어 조부(1127년~1129년)는 귀비 반씨 소생으로 3세에 요절했다.[27][28]양자인 효종 조신(1127년~1194년)은 수안희왕 조자칭과 수왕부인 장씨의 아들로, 4남 2녀를 두었다.[29][30] 그는 남송의 제2대 황제였다.
또 다른 양자인 신왕 조거(1130년~1188년)는 조자언의 아들로, 4남을 두었다.[31][32]
고종에게는 생모가 불명확한 딸들이 있었다.
- 조불우(강대종희): 1124년~1127년, 첫째 딸.
- 조신우(강이종희): 1124년 출생, 둘째 딸.
이들은 모두 금나라에 끌려가 기루인 세탁원으로 보내지는 수모를 당했다.[15] 그 외 강삼종희(1125년생), 강사종희(1126년생), 강오종희(1126년생)도 있었으나 북으로 끌려가던 도중 요절했다.
6. 평가
고종은 남송을 건국하고 통치 체제를 확립한 군주로 평가받지만, 악비 처형과 금나라와의 굴욕적인 화친으로 인해 비판받기도 한다. 특히 악비 처형은 민족 영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행위로 간주되어 고종의 정치적 오점으로 지적된다.[8]
수년간의 전투와 상당한 군사적 성공 이후, 고종은 평화주의적 입장을 취했다.[7] 고종과 재상 진회는 송나라 군대가 여진족을 격파하고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이는 금나라에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북송의 마지막 황제 흠종이 즉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고종은 권력을 잃을 수 있었다. 당시 악비와 한세충은 개봉을 공격하여 탈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개봉에서의 승리가 여진족이 흠종을 풀어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고종은 12개의 금 팻말을 보내 악비를 수도로 소환했다. 악비는 눈물을 흘리며 "30년의 노력이 이제 헛수고가 되었다"고 말했다. 고종은 가족을 죽이겠다는 위협으로 모든 병사를 소환했고, 악비가 수도로 돌아온 후 고종과 진회는 그를 "근거 없는" 혐의로 조작하여 투옥하고 사형에 처했다.[8]
1142년 10월 11일, 송나라와 금나라는 소흥의 조약을 체결하여 여진족이 이미 정복한 이전 송나라 영토에 대한 주장을 인정했다. 이는 고종이 두 제국 간의 평화를 위해 회수 북쪽의 모든 영토를 포기해야 함을 의미했다. 이 평화는 두 번의 사건을 제외하고 70년 동안 지속되었다. 송나라는 또한 금나라에 매년 은 과 비단 25만 필을 조공해야 했다.[9]
이 협상으로 황제의 어머니 등이 송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조약은 송나라를 "사소한 국가"로, 금나라를 "우월한 국가"로 인정했다. 사람들은 악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황제에게 돌리고, 송나라에 더 큰 위험을 무릅쓰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 한 위선적인 폭군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조약으로 송나라는 금나라의 종속국이 되었지만, 경제를 구했다. 왕조 창건 이후 정권은 이웃 국가에 대한 연간 지불보다 군사 방어에 더 많은 자본을 잃었는데, 이는 국가 수입의 약 4분의 3에 해당했다. 고종이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 싶더라도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송나라 북부 영토 재건 비용은 남부를 파산시킬 위험이 있었다. 또한 중국 남부가 송나라 통제를 받으면서 상품 운송이 강과 낙타를 통해 더욱 비용 효율적이게 되었고, 무역 장애물 제거로 상인들이 송나라와 금나라 영토 간에 상품을 수입할 수 있게 했다.[9]
7. 연호
연호 | 기간 | 서력 | 간지 |
---|---|---|---|
건염(建炎) | 원년 | 1127년 | 정미(丁未) |
건염(建炎) | 2년 | 1128년 | 무신(戊申) |
건염(建炎) | 3년 | 1129년 | 기유(己酉) |
건염(建炎) | 4년 | 1130년 | 경술(庚戌) |
소흥(紹興) | 원년 | 1131년 | 신해(辛亥) |
소흥(紹興) | 2년 | 1132년 | 임자(壬子) |
소흥(紹興) | 3년 | 1133년 | 계축(癸丑) |
소흥(紹興) | 4년 | 1134년 | 갑인(甲寅) |
소흥(紹興) | 5년 | 1135년 | 을묘(乙卯) |
소흥(紹興) | 6년 | 1136년 | 병진(丙辰) |
소흥(紹興) | 7년 | 1137년 | 정사(丁巳) |
소흥(紹興) | 8년 | 1138년 | 무오(戊午) |
소흥(紹興) | 9년 | 1139년 | 기미(己未) |
소흥(紹興) | 10년 | 1140년 | 경신(庚申) |
소흥(紹興) | 11년 | 1141년 | 신유(辛酉) |
소흥(紹興) | 12년 | 1142년 | 임술(壬戌) |
소흥(紹興) | 13년 | 1143년 | 계해(癸亥) |
소흥(紹興) | 14년 | 1144년 | 갑자(甲子) |
소흥(紹興) | 15년 | 1145년 | 을축(乙丑) |
소흥(紹興) | 16년 | 1146년 | 병인(丙寅) |
소흥(紹興) | 17년 | 1147년 | 정묘(丁卯) |
소흥(紹興) | 18년 | 1148년 | 무진(戊辰) |
소흥(紹興) | 19년 | 1149년 | 기사(己巳) |
소흥(紹興) | 20년 | 1150년 | 경오(庚午) |
소흥(紹興) | 21년 | 1151년 | 신미(辛未) |
소흥(紹興) | 22년 | 1152년 | 임신(壬申) |
소흥(紹興) | 23년 | 1153년 | 계유(癸酉) |
소흥(紹興) | 24년 | 1154년 | 갑술(甲戌) |
소흥(紹興) | 25년 | 1155년 | 을해(乙亥) |
소흥(紹興) | 26년 | 1156년 | 병자(丙子) |
소흥(紹興) | 27년 | 1157년 | 정축(丁丑) |
소흥(紹興) | 28년 | 1158년 | 무인(戊寅) |
소흥(紹興) | 29년 | 1159년 | 기묘(己卯) |
소흥(紹興) | 30년 | 1160년 | 경진(庚辰) |
소흥(紹興) | 31년 | 1161년 | 신사(辛巳) |
소흥(紹興) | 32년 | 1162년 | 임오(壬午) |
8. 재상
순서 | 이름 | 재임 기간 | 칭호 | 자(字) | 봉호 | 시호 |
---|---|---|---|---|---|---|
태재(太宰)/소재(少宰) 겸 시랑(侍郎) | ||||||
1 | 장방창 | 1127년 | 태재(太宰) 문하시랑(門下侍郎) | 자능(子能) | - | - |
상서복야(尚書僕射) 겸 시랑(侍郎) | ||||||
2 | 이강 | 1127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중서시랑(中書侍郎) ↓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문하시랑(門下侍郎) | 백기(伯紀) | - | 충정(忠定) |
3 | 황잠선 | 1127년 ~ 1129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중서시랑(中書侍郎) ↓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문하시랑(門下侍郎) | 무화(茂和) | - | - |
4 | 왕백언 | 1128년 ~ 1129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중서시랑(中書侍郎) | 정준(廷俊) | - | 충정(忠定) |
5 | 주승비 | 1129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중서시랑(中書侍郎) | 장일(藏一) | - | 충정(忠靖) |
6 | 여이호 | 1129년 ~ 1130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중서시랑(中書侍郎) | 원직(元直) | 진국공(秦國公) | 충목(忠穆) |
상서복야(尚書僕射) 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 ||||||
7 | 두충 | 1129년 ~ 1130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 공미(公美) | - | - |
8 | 범종윤 | 1130년 ~ 1131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 각민(覺民) | - | - |
9 | 진회 | 1131년 ~ 1132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 회지(會之) | - | 유한(謬狠) |
10 | 여이호 | 1131년 ~ 1133년 |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 원직(元直) | 진국공(秦國公) | 충목(忠穆) |
11 | 주승비 | 1132년 ~ 1134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 장일(藏一) | - | 충정(忠靖) |
12 | 조정 | 1134년 ~ 1138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 원진(元鎭) | 풍국공(豊國公) | 충간(忠簡) |
13 | 장준 | 1135년 ~ 1137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 덕원(德遠) | 위국공(魏國公) | 충헌(忠獻) |
14 | 진회 | 1138년 ~ 1155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 회지(會之) | - | 유한(謬狠) |
15 | 심해 | 1156년 ~ 1159년 |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 - | - | - |
16 | 만사설 | 1156년 ~ 1157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 원충(元忠) | - | 충정(忠靖) |
17 | 탕사퇴 | 1157년 ~ 1160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 진지(進之) | 기국공(岐國公) | - |
18 | 진강백 | 1159년 ~ 1162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 장경(長卿) | 노국공(魯國公) | 문정(文正) |
19 | 주탁 | 1161년 ~ 1162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 한장(漢章) | - | - |
참조
[1]
논문
Legitimation Discourse and the Theory of the Five Elements in Imperial China
https://muse.jhu.edu[...]
2014
[2]
서적
China: Land of Dragon and Emperors
https://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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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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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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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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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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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Chinese Cuisine - Recipe and Their Stories
Foreign Language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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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서
Adoptive mother of Song Xiaozong.
[12]
문서
『宋史』巻32, 高宗紀九 紹興三十二年六月丙子条による。
[13]
문서
金の宗室の完顔宗賢に妻にされて、ふたりの男子(高宗の異父弟)を産んだ。
[14]
문서
『靖康稗史箋證』巻5:賜宋妃趙韋氏、鄆王妃朱鳳英、康王妃邢秉懿、姜酔媚,帝姫趙嬛嬛、王女粛大姫、粛四姫、康二姫,宮嬪朱淑媛、田芸芳、許春雲、周男児、何紅梅、方芳香、葉壽星、華正儀、呂吉祥、駱蝶児浣衣院居住者。
[15]
문서
『靖康稗史箋證』巻3:康一即仏佑、康二即神佑均二起北行、入洗衣院
[16]
문서
『靖康稗史箋證』巻3:韋賢妃、随入斎宮
[17]
문서
木村 P.175
[18]
문서
飯島 P.233
[19]
문서
中西 P.164
[20]
문서
西林 P.100
[21]
문서
みな追い出され、実家へ返された。
[22]
문서
みな高宗の即位後数年間、流亡中の側室。多くは死去あるいは消息不明となった。
[23]
문서
みな高宗の崩御後、実家へ返された。
[24]
문서
강왕비(康王妃)/가국부인(嘉國夫人)/송국건염부인(宋國建炎夫人)/의절황후(懿節皇后)
[25]
문서
정강의 변으로 금나라에 끌려갔기 때문에, 실제로 황후 자리에 오르지는 못함.
[26]
문서
화의군부인(和義郡夫人)/귀비(貴妃)/덕수궁황후(德壽宮皇后)/수성태상황후(壽聖太上皇后)/수성황태후(壽聖皇太后)/중화궁태후(重華宮太后)/융자태황태후(隆慈太皇太后)
[27]
문서
위국공(魏國公)
[28]
문서
군의 반란으로 인하여 잠시 재위에 올랐으나, 퇴위되고 황자로 강등 후 얼마 못가서 요절함.
[29]
문서
건국공(建國公)/보안군왕(普安郡王)/건왕(建王)
[30]
문서
북송 태조의 아들 진강혜왕(秦康惠王) 조덕방(趙德芳)의 6대손이자 영국공(英國公) 조유헌(趙惟憲)의 5대손
[31]
문서
오국공(吳國公)/숭국공(崇國公)/은평군왕(恩平郡王)/황질(皇侄)
[32]
문서
북송 태조의 아들 진강혜왕(秦康惠王) 조덕방(趙德芳)의 6대손이자 남강군왕(南康郡公) 조유능(趙惟能)의 5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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